<신미선, 설렘 여정의 색채 미학>
- 서성록 안동대 명예교수(미술평론가)
꽃의 이미지는 신미선에게 있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주요 모티브가 된다. <하늘꽃>, <하늘을 향한 노래> 등의 작품에서 보듯이 하늘에 관한 기대와 설렘이 아로새겨진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꽃은 그가 기대하는 세계의 설렘과 소망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자리매김된다. 그와 같은 흐름은 2015년작 <영혼의 꽃>에서 좀 더 발전된다. 여기서는 배경이 사라지고 만개한 꽃이 당당한 주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꽃의 이미지에 더 주목하고 그 자체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연작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색의 콘트라스트와 활기찬 붓질이 눈에 띈다. 만일 꽃이 한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영혼이 위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삶의 구도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며, 두드러진 색의 대비는 영혼의 밤과 낮이 교차하거나 혹은 천상의 빛으로 정결해지는 것을 각각 암시한다. 이처럼 <영혼의 꽃> 연작은 내적으로 생명을 향한 그의 영적인 추구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꽃의 모티브와 얽혀 있는 것은 아니다. <The Creation>(2017) 연작에서는 물줄기의 이미지나 수직의 나무 이미지가 화면 중앙에 위치한다. 나무 같기도 하고 물줄기 같은 이미지는 경이로운 생명의 탄생 장면을 암시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출발점은 다양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혼재함, 색상의 다양함, 세상 만물에 담겨 있는 근본 원리와 창조의 그날을 기록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흰 이미지는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라기보다 불가역적이거나 비가시적인 능력의 역사를 나타내는 신비의 빛일 수도, 침묵과 사망을 압도하는 로고스일 수도 있다. 텅 빈 공간을 가르거나 흑암의 공간에 빛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천지창조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때의 광경은 이미지와 색깔로도 전달되지만 눈여겨볼 것은 물감의 레이어이다. 창조의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여러 물감을 쌓아 올리는 수법을 기용하는데, 축적된 레이어를 통해 감상자가 벅찬 감정에 몰입하고 진하게 밀려드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여러 겹의 레이어가 조형적 측면에서 화면에 깊이감과 구조감을 부여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한편, 꽃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초기의 구상적 이미지에서 추상적 이미지로 점차 변모해왔다. 지금의 작업은 꽃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유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꽃이 지닌 함의는 인생의 여정, 질곡과 심연에서의 탈출 등으로 깊어지고 넓어진다.
<존 번연과의 대화>는 작가가 존 번연의 저술을 읽으며 느낀 사실을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상한 심령을 나타내는 색상을 차분하고 우아한 보라색으로 결정하고 사색적인 모습의 인간을 표현하였다.” 여기서 꽃의 이미지는 이미 식물로서의 성격 대신 더 큰 의미로 확장되는데, 꽃은 인간의 삶, 더 정확히는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여정을 지시한다. 꽃의 형상은 우주를 항해하고 있는 행성과 닮아있고 여러 갈래의 길들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위를 바라보는 형상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그리고 화면 상단의 아치형 문은 여행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문을 각각 암시한다. 말하자면 화면 속에는 여러 난관과 곡절을 거치며 살아가는 삶, 그 모습을 응시하는 형상, 그리고 여행자가 안개를 뚫고 드디어 도달하는 관문 등으로 그림의 전체 흐름을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우화적으로 쓴 존 번연의 『천로역정』 중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마주해야 할 7개의 방을 소개한다. 그림이 있는 밀실, 먼지가 가득한 거실, 두 명의 아이가 앉아 있는 조그만 방, 불길이 타오르는 방, 장엄한 궁전, 침울한 사람이 있는 방,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방 등이다. 각각의 방이 가리키는 의미는 각기 다르지만, 주인공 ‘크리스천’이 천국에 이르는 여행길에서 유의해야 할 지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신미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은 아치문들은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 거치는 관문을 표상한 것으로 작가는 7개의 문을 “인생 여행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의미를 지닌 문”이며 각각의 문을 통과할 때마다 “크고 작은 아픔이 수반되지만 성장과 성숙이라는 기쁨의 열매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존 번연이 삶의 여정을 완주하도록 성원하는 마음을 담았듯이 신미선 역시 이 땅을 살아가는 여행자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우리가 많은 수수께끼를 해결하며 살고있는 것 같아도 정작 어린 시절 바라보던 밤하늘의 달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비를 파헤쳤다고 자부하나 그 결과 풍요로운 밤을 잃어버렸다. 철학자이자 소설가 C.S 루이스(C. S. Lewis)는 인간존재 안에는 무언가를 동경하는 심오하고 강렬한 감정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경험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루이스는 이 감정을 ‘기쁨’(Joy)이라고 부르며 이 기쁨은 그 근원과 목적으로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기쁨’은 그 원천을 천국에 두고 있으며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우리는 다행히 신성한 드라마, 웅장한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피조된 존재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오래도록 간직한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우리가 진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영혼을 기쁨으로 채워줄 이야기의 히어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신미선의 그림은 우리의 기쁨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려준다. 진정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의 네 번째 책 『은의자』(Silver Chair)에는 언더랜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왕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 번도 낮의 햇빛을 보지 못했고, 자연 세계의 신선한 공기와 화려한 색깔도 경험하지 못했다. 만일 우리 역시 언더랜드 속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바이올렛, 핑크, 옐로우, 그린 등 곱고 명랑한 색상들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언어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듯이 색의 언어 역시 작가의 감정 상태를 투영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색상들은 내적 기쁨을 나타내거나 진짜 세계를 향한 설렘의 표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오롯한 색채의 직조, 그리고 소망의 미학을 빌어 저 너머의 세계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언가의 ‘덮개’에 씌워져 진정한 낮의 세계를 낯설어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작가는 과감히 ‘덮개’를 걷어내고 언더랜드에서 탈출하여 바깥세상의 “저 색깔과 표정을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만족을 채워주는 ‘기쁨’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 그것이 무엇이든 초월의 표지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경험 세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초월의 표지’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절망’은 거대하나 ‘희망’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신미선 같은 작가가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의 탐색을 위해 오늘도 주어진 것들을 돌아보고 경탄하며 마음의 갖가지 색깔로 화면을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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